본문 바로가기

한국역사

을지문덕

을지문덕 살수대첩 유우중문 시

고구려의 장군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영양왕(재위: 590년 ~ 618년) 시대에 활약한 장군으로, 수나라의 제2차 침입을 막아낸 용맹한 지휘관으로 유명합니다. 612년, 수나라 황제 양제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이때 을지문덕은 평양성을 방어하며 미끼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수나라의 군사를 피로하게 하였습니다.

생몰연대와 출신

을지문덕의 출생 연도와 사후 연대에 대한 기록은 알려진 바가 없으며, 대부분의 생애 내용이 미상입니다. 일부 기록에는 평양의 석 다산에서 태어났거나, 선비족 출신의 귀화자라는 주장이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또한, 을지문덕의 출신이나 관직에 대한 기록도 부족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그를 고구려 복성 출신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제2차 고수전쟁 발발

612년 1월, 수나라 황제 양제가 100만 명 이상의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에 침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동성에서 수나라군의 진전이 지지부진해지자 을지문덕은 30만 5천 명의 별동대를 편성하여 평양성으로 진군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별동대는 식량과 무기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을지문덕은 적극적인 유인 작전을 펼쳐 수나라군을 피로하게 했습니다.

을지문덕의 전략

을지문덕은 수나라군을 굶주린 상태로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속 전투를 회피하고 피하게 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수나라군은 지쳐가며 나아가는 동안 을지문덕은 꾀를 부려 수나라군이 별동대를 추격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전략 덕분에 수나라군은 식량 부족과 피로로 인해 회군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사후 숭앙

을지문덕은 사후에 극찬을 받는 영웅으로 기억되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고구려의 존속을 지켰다는 점에서 강조되며, 다양한 사당과 기념비가 건립되었습니다. 그의 위업은 국가의 독립을 지키고 역사에 남는 위대한 행적으로 인식되며 다양한 문학작품에 소재가 되었습니다.

수공에 대한 오해

살수 대첩과 관련하여 수공(水攻)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역사 기록에는 상류의 둑을 무너뜨리고 수공을 사용한 내용은 등장하지 않으며, 이러한 설화는 근대에 생겨난 민간 전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을지문덕의 전략은 미끼와 유인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입니다.

우중문의 대하여

제2차 여수전쟁 (612년) - 고구려의 을지문덕의 참전 612년, 양제의 제2차 여수전쟁에서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은 두 번째 여수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그는 좌 12 군인 낙랑도군을 지휘하며 오골성(烏骨城)으로 향했습니다. 6월, 평양을 직접 공격하는 별동대 9군 중 하나로 선발되어 우문술과 함께 진격했습니다. 을지문덕은 전투에서 야윈 말과 나귀 수천 마리를 뒤로 배치하여 뒷발로 사용하고, 동안 고구려 군이 치중대를 기습하면 반격하여 격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압록수에 도달하자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에 항복한 척하여 그들의 진영으로 들어갔습니다. 을지문덕이나 고구려 왕이 오면 잡아내라는 양제의 명령을 받았기에 먼저 그를 잡으려 했지만, 상서 우승(尙書右丞)인 유사룡이 이를 막아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우중문이 돌아오라고 요구했을 때 을지문덕은 따르지 않고 강을 건넜습니다. 이에 우중문은 정예 기병을 선택하여 강을 넘어 추격하였지만 계속 싸울 때마다 패배했습니다. 을지문덕은 이에 우중문을 희롱하는 시인 "유우중문"을 보냈습니다. 답서를 보내 회유를 시도했지만 을지문덕은 불을 피우고 달아났습니다. 을지문덕도 놓쳤고 군량도 다 떨어져 우문술은 그만 돌아가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우중문은 지금 돌아가면 어떻게 황제 앞에서 면목을 유지할 것이냐며 화를 내며 추격을 계속했습니다. 우문술도 언성을 높였지만, 이전에 양제가 우중문의 계획에 따르라고 했던 것을 감안해 따르게 되었습니다. 7월, 평양 직전까지 들어갔지만 얻은 것 없이 굶은 병사들을 데리고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건제를 유지하며 방진을 갖추고 왔지만 살수에서 습격을 받아 2,000여 명만이 돌아오고 패배했습니다. 양제는 크게 분노하여 패배한 장수들을 서민으로 강등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추격을 고집한 우중문에게 죄를 씻어주었습니다. 우중문은 홀로 분노하며 병을 얻었고, 이로 인해 몹시 병이 악화되자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나이 68세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을지문덕이 지은 시

정해진 제목이 없어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증수장우중문시(贈隋將于仲文詩), 유우중문(遺于仲文) 등으로 불린다. 한국에서 현전하는 이른 시기의 5언 4구 고시(古詩)이다.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 귀신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 신묘한 계획은 땅의 이치를 다했노라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 싸움에 이겨서 그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 만족함을 알고 그만 두기를 바라노라

'한국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몽전쟁  (1) 2023.09.21
조선의 4대 사화  (0) 2023.09.20
세종대왕 업적  (0) 2023.09.19
조선 태종  (0) 2023.09.19
임진왜란 배경 발발 과정 영향  (0) 2023.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