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전쟁
여몽전쟁 고려 몽골 관계 배경 초기 중기 말기 영향
여몽전쟁 배경
고려 시대에는 최씨의 독단적인 통치가 진행되었으며, 이러한 동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는 테무친이 나타나 몽골족을 통일하고, 1206년(희종 2년)에 칭기즈 칸으로 칭하며 강력한 제국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칭기즈 칸은 세계 정복을 목표로 동·서양 다양한 국가를 공격하고,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 중 하나를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남하하여 금나라를 침공하면서 금나라 내부에서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요나라 유민 중 일부는 대요국을 세우려고 하며 여진족과 협력하며 기회를 모색했지만, 결국 몽골의 추격을 받아 1216년(고종 4년)에 고려의 국경을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몽골은 여진족 동맹국과 함께 거란족을 소탕하기 위해 고려에 입장하면서 고려군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을 격파했습니다(→강동성 전투). 몽골은 이러한 계기로 고려와 협정을 체결하며 매년 높은 조공을 요구하였지만, 동시에 몽골 사신은 고려에 무례한 행동을 하며 고려가 그들을 적대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225년(고종 12년) 음력 1월에 몽골 사신 저고여(箸告與)가 국경 지역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으로 보았고, 고려는 이 사건이 금나라 사람들에 의한 피살로 주장하며, 양국 간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었고 궁극적으로 국교 단절까지 이르렀습니다. 몽골은 이후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전쟁의 결과
여몽전쟁 초기
1231년, 오고타이 칸은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 살해 사건과 관련하여 고려에 항복을 요구하는 국서를 보내면서, 고려와 몽골 제국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오고타이 칸은 몽골 제국 출신 장수 살리타를 파견하여 고려를 정복하도록 했습니다. 살리타가 지휘하는 몽골군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의주를 점령했고, 귀주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귀주성을 지키던 고려의 장수인 박서와 김경손을 비롯한 고려군은 몽골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귀주성을 함락하기 위해 몽골군은 대형 병기와 포차, 누차 등을 사용하여 맹공을 펼쳤지만 귀주성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몽골군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진격하고 개경을 포위했습니다. 고려 조정은 개경이 포위당한 후 몽골 제국에 강화를 요청하고 몽골 사신들에게 막대한 공물을 제공했습니다. 이에 따라 몽골군이 강화의 박서도 항복하여 전투가 중단되었습니다. 몽골군은 강화를 감시하고 고려에 개입하기 위해 개경과 평안도 일대에 다루가치와 72명의 관리를 파견하고 철수했습니다.
여몽전쟁 중기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은 고려의 본래 목표가 아니었으나 몽골의 침공으로 인해 항전의 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강화도로의 천도를 결정하고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며 강력한 항전태세를 구축했습니다. 몽골은 강화도로 침입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서경의 홍복원을 앞세워 개경을 점령하고 남경을 공격한 후 한강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몽골은 강화도를 점령하지 못하고, 고려에 항복을 권고하는 사신을 보내었지만 고려는 응하지 않았으며 몽골은 다시 북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이때 몽골 군대는 철수를 주저하다가 최우가 북계병마사 민희에게 지원을 보내 홍복원을 처벌하고 많은 지역을 회복했습니다.
여몽전쟁 말기
고려는 몽골의 태도와 간섭을 계속 받았으며, 1257년에는 몽골에게 보내던 세공을 중단하면서 몽골은 다시 고려에 대한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이에 고려는 몽골에 대한 항전의 기운을 회복하였으며, 고려의 정치적 상황이 변동되어 반원세력이 나타났습니다. 1259년, 고려는 몽골의 요구에 항복하였고, 이에 따라 몽골은 강화도를 공격하지 않고 대군을 철수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 내에서 반원세력이 커져 1268년에는 원종을 폐위시키지만, 원나라의 군대 파견으로 1270년 원종이 다시 복위되면서 고려는 몽골의 지배를 계속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고려는 몽골의 요구에 계속 반응하면서 몽골의 내정간섭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몽전쟁의 결과
고려 몽골 전쟁의 결과는 다양한 측면에서 영향을 미쳤습니다. 1270년에 원종이 개경으로 복환되면서 고려는 몽골에 완전한 복종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신정권의 지배력이 붕괴되었으며, 임유무 등 무신정권의 주요 인물들은 처형되었습니다. 또한, 고려는 제후국으로 위상이 하락하였습니다. 왕실 용어와 관제 등이 몽골의 지배에 따라 수준이 하락하였습니다.
몽골의 내정 간섭과 보존
몽골의 침공 이후에도 고려의 국체는 보존되었습니다. 몽골 칸 쿠빌라이는 "고려의 국체와 풍속을 보존하라"고 명령하여 세조구제(世祖舊制)를 시행하게 했습니다. 이로써 고려는 국가의 핵심을 유지하였습니다. 왕실 사이의 결혼과 내정간섭: 원종은 몽골 황실과의 결혼을 통해 내정간섭을 줄이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몽골은 고려 왕자들을 몽골으로 보내 교육을 시켰고 왕실을 중심으로 묶어 내정간섭을 강화했습니다. 고려의 왕자들은 몽골에서 성장하며 몽골 제국의 작위가 우선시되었습니다.
중조(重祚) 현상
내정간섭과 왕실 결혼 등으로 고려는 중조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는 왕위에 대한 경쟁과 변화를 나타냈습니다. 몽골 침략과 내정간섭에 대해 반발하거나 협조하는 고려 귀족들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 백성들은 몽골 침략과 귀족들의 행동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고려 몽골 전쟁은 고려의 국내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고려는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국가의 핵심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몽골의 내정간섭과 왕실 결혼 등으로 고려는 제후국으로 전락하였으며 중조 현상과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또한 귀족들의 역할과 고려 백성들의 희생 역시 전쟁의 결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